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평가 (문단 편집) === 명분과 세력비율 === 유비는 유기의 보호자라는 명분이 있었고 유표 세력과 7년간 통교했으며 유기는 유비의 참모 제갈량을 중시했으며 영웅기에 따르면 유표가 병에 걸렸을때 영(領)형주자사에까지 올랐다. 유비와 손권은 계약관계가 아니라 힘을 합쳐 조조란 공동의 적에 맞서 싸운 동맹관계로서 이건 학자들이 인정하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정설이다. 손유동맹은 서로가 없으면 서로 조조에게 멸망당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관계이다. 다만 유비쪽이 조조에게 어그로를 끈게 많고 세력도 손권에 비해 열세였으므로 유비가 훨씬 아쉬운 건 사실이긴 하지만, 노숙의 말 따라 과연 항복한 군주의 삶이란 어떨까? 장수를 예로들면 장수는 원소와 결전 이전에 항복해서 세력의 균형을 잡는데도 도움이 됐고 후방의 요지의 군벌이라 지형적으로도 요긴한곳의 군주였다. 실제로도 장수는 몇천호의 고위직이었으나 조비때 자살당하고 그 아들은 반란혐의로 숙청당했다. 그래도 장수는 천하의 대세가 기울기전에 항복했고 그 이후에 유비나 손권이나 유표나 유장같은 군주들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광고판같은 역할이기도 해서 더 대우받은건데 그것도 군주의 한번의 트집으로 자살해야 하는 처지가 되는것이다, 그리고 만약 손권까지 항복한다면 남은 세력은 유장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금방 항복하거나 정벌되면 광고판 역할도 의미없는 것이다. 그냥 화려한 방에 살면서 언제 사형당할지 모르고사는 죄수나 다름없다. 유비 역시 싸우던가 도망치던가 라면 손권 역시 싸우던가 도망치던가 뿐이다. 적벽의 해전에서부터 시작해 유비군은 육상전에서도 활약했는데 이들의 합세가 아니었다면 조조를 물리칠 수도 강릉성을 차지할 있었을지가 의문인 손권이다. 유기야 선주전 보면 유비 1만 유기 1만인데다 표도 유비가 유기를 형주자사로으로 올리고 사후 추대도 유비인 점에서 유기가 유비보다 어떠한 우위도 없는데다가 유비는 유표가 병들었을때 영형주자사로 올랐었고 나중에 강하태수였던 유기를 형주자사로 올렸으니[* 이는 형주를 다스렸던 유표의 아들이 후계자이며 자신은 그의 후견인임을 강조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유비가 유기의 휘하이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손권의 경우 손권이 유비를 두려워 하고 여동생을 바쳐 딴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한 점을 보아 완전한 종속관계로 보진 않았겠지만 형주 내놔, 익주 침공 시도나 무례한 외교 행위 등 전반적으로는 유비를 아래로 손권이 봤다는 시각이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유비는 경구에 형주를 감독하겠다고 다녀와 강릉을 얻은 후 두번 다시 손권을 만나지 않을것이며 그의 밑에 서지 않을것이라 주변에 선언하면서 자신의 부하들에게 우리는 손권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천명하기도 했다. 게다가 유표의 아들 유기를 흡수하고 유표의 구신과 구병의 투항까지 유비가 형주를 차지할 명분은 완벽한데다 형남 4군을 얻고 유비는 순식간에 대세력으로 성장한다, 손권도 환성 제외하곤 사람이 없어 유명무실한 여강 제외하곤 단양 오 회계 예장 겨우 4개군에 주유에게 겨우 1만을 준 엇비슷한 레벨의 군주이다. 형남 4군은 동오 4군과 인구도 비슷한데다가 전쟁의 피해도 입지 않아 수만의 병력을 육성할 수 있는 땅이었다, 동맹관계이긴 하지만 유비가 형남 4군과 공안을 차지하고 유표의 옛 병력과 여강의 수만 부곡을 얻은순간 손권은 유비쪽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관계였다. 이는 손권이 유비를 형주목으로 인정하고 여동생을 바쳐 우호관계를 굳히려는 데서도 설명된다. 실점유를 한것도 유비지만 유표의 구신 중에 손권에게 자발적으로 투항한 인물이 없으며 노숙이 강릉을 빌려주면서 말했듯이 형주군민들도 만족들에게도 당시 손권은 민심을 얻지 못했다. 유비를 손권이 안 커지게 막을 수 있음에도 키웠다기 보다는 여건상 못 막을 시기라고 보는게 신빙성이 높다. 점령을 막을 여력이 있었는데 안 막고 명분상 우위인 유비를 이 정도로 키워놨다면 주유전의 손권이 주유와의 대화를 통해 유비를 경계하는 모습에도 상충된다. 차라리 유비가 커져서 먹을 수 없으니 노숙의 입장처럼 함께 있으면서 최대한 이익을 보자, 조조가 있는 이상 지금은 출혈을 감수하면서 형주를 먹긴 힘들고 나중에 삥을 뜯자라고 인식한게 적당할 것이다. 촉한 내 인식인 자력으로 얻은 땅이라는 촉서 기록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또 세력비율로 보자면 제3자의 눈으로 봤을 때도 손권이 유비보다 그정도로 큰 우위였는가 말하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후한서 군국지 기준으로 남군 강하 형남 4군이 회남 없는 양주 인구랑 400만명 정도로 엇비슷하다. 남군공방전 끝난 뒤면 유비도 남군 빼고 다 가진 상황임으로 후한서 군국지 기준 이 정도만 해도 300만 넘는 인구로 호락호락한 상태가 아니다. 인구 수는 삼국시대 때 많이 감소하지만 세력이 비슷하다는 추론은 할 수 있다. 자기와 비슷한 몸집까지 키워놓은 상대를 두고 '저 사람은 나와 종속적인 연합 관계이다'라 한다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명분은 후달리는 상황에서 말이다. 적벽대전 때 직후엔 양쪽의 세력 차가 많이 날 때이긴 하지만 이후 유비가 형남 4군을 손쉽게 흡수하고 손권이 합비공방전 때 원군이 온다고 하자 상황 확인도 하지 않고 급하게 퇴각한 상황으로 보면 남군공방전에 동원한 수만명이 형주 방면에 동원가능한 최대 전력이라 보여진다. 수만명으론 유비와 조인을 둘 다 상대할수 없고 유비 없이 조인과의 전투가 승리할지 장담도 없다. 한마디로 합비, 강릉을 공격하는것만으로도 손권은 여력이 없었으며 유비와 손권이 손을 안 잡고 서로 싸우는 각이 세력이 큰 손권에게도 안 나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세력비로 보아 조조를 앞에 둔 상황에서 동맹 관계를 벗어난 속국이나 무조건 밑으로 기어들어가야는 전력으로 볼 정도로 적다고 할 수 없다.유비가 손권을 거기장군 영(領)서주목으로 추천하는 표를 올렸고 손권은 그 답례로 유비를 영(領)형주목으로 올렸으며 유비가 나중에 경구로 와서 형주를 감독하겠다, 즉 강릉을 빌리겠다고 한 것도 순순히 수락했다. 이는 유비에게 퍼주는게 아니라 형주에게 인심을 잡지 못했고 방어선을 줄이기 위함이다. 또 반조조라는 명분도 사실 유비가 제공해준 것이다. 조조의 치세 20여년동안 유비는 반조조의 간판이었으니까. 더군다나 형주는 손권과 무관한 유표의 땅으로 유기의 뒤를 이은 유비가 자립할 명분은 충분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